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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면 위치도

토지면 마을유래

연혁

화엄사에 딸려 도자기를 만들어 바치던 토지처(土旨處)였는데 조선시대에 토지면이 되었으며 구만, 단산, 신단산, 월곡, 중산, 하죽, 상죽, 내죽, 도산, 파도, 오미동, 환동, 중대, 불당, 율치, 장요, 용두, 금동, 원내, 음안, 오평, 봉소, 내계, 송정, 외계, 외동, 중추, 직전, 수평, 당치, 평도, 죽리, 원기, 신촌, 남산 등 35개 마을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에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마산면 하사리(下沙里) 일부를 병합하여 구산, 파도, 오미, 문수, 용두, 금내, 송정, 외곡, 내서, 내동 등 10개 리로 통폐합하였다. 동쪽으로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남쪽으로 간전면과 문척면, 서쪽으로 마산면, 북쪽으로 산동면과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에 닿았다.

위치

동쪽으로 경남 하동군 화개면과 서쪽으로 마산면과 북쪽으로 전북 남원시와 산동면과 접경하였고 남쪽으로 섬진강을 끼고 간전면과 문척면과 접경하였다. 동북방으로 지리산을 등지고 서쪽으로 섬진강 연안에 330㎞의 넓은 평야가 있다.

토지면 마을

파도리

파도(把道)마을

지금부터 약 300년 전(1680년경) 평강 채씨가 정착하여 개척하면서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본동에 예속된 반곡촌이 먼저 생겼다고 한다. 본동과 반곡, 동방천 3개의 자연마을을 이루고 있으면 처음 정착했던 평강 채씨는 타지로 이거하고 그 후 입주한 전주 이씨, 제주 고씨 등이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이 형성되면서 바다리(봉진리蜂橋里), 소교(所橋), 해교(海橋)라 불리어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파도리로 개칭하였다.

옥산(玉山)마을

옥산 마을은 원래 토지면 파도리 7반으로 국도 19호선인 파도리 입구에서 토지면사무소 앞 파도리 지역으로 35가구가 거주하여 오다가 1975년 1월 1일 옥산 마을로 분구되었다. 옥산 마을은 옥강정(玉岡亭)이라 불렀는데 1956년에 옥산으로 개칭되었으며 파도리 본 마을에서 분구되기까지 1972년부터 마을 자체적으로 자치회(自治會)를 구성마을 기금조성을 위한 공동작업과 주민들의 친목과 화합을 마을 규약을 제정 연 3회의 주민 총회를 개최 주민들의 생활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는 옥산마을 동지(洞誌)에서 수록 관리되고 있다.

구산리

구만(九灣)마을

삼한 시대 마한 고랍국의 중심지로 치소(治所)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개성 왕씨가 개척하였다. 김해 김씨, 전주 이씨가 산세와 수세가 좋다하여 입촌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토지 중앙경로당 앞에 보존되어 있는 입석(立石)과 고인돌을 근거한 자료에 의하면 삼한 시대의 부족 국가의 터전과 들판, 논에서는 기와 조각과 질그릇 조각을 발견할 수 있는 점으로 보아 오래된 마을로 볼 수 있으며 구만 호가 살았다하여 구만이라 하고 아홉 물굽이가 모인 곳이라 하여 구만(九灣)이라 했다. 아홉 물굽이는 덕은천, 한수천, 칠의내, 머리내, 배우내, 서시내, 옥이내, 반내, 동구내이다. 그런데 문척면 화정(花亭)이 우리말로 ‘꽃징이’이다. 이 꽃징이가 강쪽으로 육지가 돌출된 부분을 뜻하고 반대편 구산리쪽으로 섬진강이 굽어드는 곳이므로 구만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구만은 ‘구미+안’의 준말이다. 회관 마당에 있는 소나무의 수령을 약 300여 년 이상으로 추정한 것으로 보아도 오래된 마을임엔 근거가 있으며 중앙경로당 앞 감옥이 있었는데 죄인을 가두는 옥으로 보아 삼한 시대부터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 3권 구례현 고적 항에 ‘토지처(土旨處)는 구례현의 동쪽 10리에 있다.’고 했다. 중앙경로당 앞에 옥터는 토지처에서 죄인을 가두던 감옥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 시대에 토지처가 있던 마을이다.

단산(丹山)마을

회관에 있는 괴목나무의 수령이 약 400여 년으로 되었다는 추정이 있으나 김해 김씨<김삼암(金三岩)> 집안이 11대까지 살았다는 근거에 의하면 마을의 설촌시기는 약 300여 년 전으로 보인다. 원래 토지면 구산리(구만-단산)와 같은 마을이었으나 구만 마을에서 독립하여 행정구역으로는 단산, 신단산, 월곡, 사지묵, 중산 등 5개 마을을 합하여 운영되어 오다가 사지목(12가구) 중산리 2뜸(22가구)은 여수·순천 10·19사건 때 폐촌되었으며 월곡 8가구는 1980년대에 폐촌되어 지금은 40여 가구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오미리

내죽(內竹)마을

약 500년 전인 1,500년경 진주 하씨(晋州河氏), 청도 김씨(淸道金氏), 경주 이씨(慶州李氏)에 의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그 후 문화 유씨(文化柳氏), 진주 정씨(晋州鄭氏) 등이 입촌하면서 큰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의 중심의 당산나무를 보아도 마을의 형성 시기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나무가 큰 마을에 울창하여 대를 상징한 대(竹)자와 문수천의 시냇물을 따서 (내)인 ‘대내’라고 불렀다는 설과 안쪽에 있다하여 내죽(內竹)이라 불렀다 한다.

하죽(下竹)마을

조선 영조 때 경주 이씨 이기명(李基鳴)이 경주에서 길지(吉地)를 찾아 본 마을에 정착하여 경주 최씨 등과 함께 큰 마을을 이루었으며 풍수지리설에 명지라 하여 각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대나무가 온 마을에 울창하여 ‘대내’라 하였고 하죽(下竹)은 아랫방면, 바깥이다 하여 바깥대내, 외죽(外竹)이라는 명칭도 있었다 한다.

오미(五美)마을

영조 24년(1748년) 당시 삼수부사(三水府使)인 문화 유씨 유이주(柳爾冑)가 풍수지리설의 금환락지를 찾아 이주해와 99칸의 대가를 건축 문화 유씨가를 이룩하였다는 설과 1924년경 상원갑(上元甲)에 환동과 추동(오릿골과 샛뜸)에 금환락지의 터를 잡아 서산 유씨, 성산 이씨 등이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오미(五美)의 오동은 내죽(內竹), 하죽(下竹), 백동(白洞), 추동(樞洞), 환동(還洞)을 말하며 또한 오미의 다섯 아름다움은 월명산(月明山), 방장산(方丈山), 오봉산(五峰山), 계족산, 섬진강(蟾津江)이 있다하여 오미라 불렀다고도 한다.

중산(中山)마을

1,500년경에 낭주 최씨(朗州崔氏) 13가구가 거주하였다고 한다. 1909년에 청도 김씨(淸道金氏), 진주 정씨(晉州鄭氏), 밀양 박씨(密陽朴氏), 의령 남씨(宜寧南氏), 개성 왕씨(開城王氏), 해주 오씨(海州吳氏), 광산 김씨(光山 金氏), 진주 강씨(晋州姜氏)가 살았고 그 후 죽산 박씨(竹山朴氏),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들어왔다. 1945년 해방 때 39가구가 살았고 1948년 여수·순천 10·19사건 때 51가구가 살았는데 내죽과 하죽 마을로 소개하고 토벌대가 마을을 소각시켰다. 중산 마을 사람들은 덕천 김 선생의 문하생으로 1995년 5월 21일에 김 선생 추모비(追慕碑)를 세우고 매년 한 번씩 추모행사를 한다.

용두리

용두(龍頭)마을

임진왜란 초기 1,600여 년경 서산 유씨(瑞山柳氏)가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후 경주 김씨(慶州金氏) 등 각 성씨가 풍수지리설에 의해 금환락지를 찾아 이주하면서 큰 마을이 이루어졌고 배틀재, 상촌(쇳골), 하촌(굴뚱, 대상)으로 마을이 산재했으나 배틀재 마을은 국도확장으로 폐촌되고 토지 주유소와 2개의 식당이 있다. 지리산의 용맥이 노고단 형제봉을 경유하여 내려오다가 섬진강에 이르러 머물렀는데 지리산 줄기가 강물에 침식되어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 강물에 잠기듯 굽어보고 있었다. 절벽의 형상이 용머리 같다하여 용두(龍頭)라 부르게 되었다.

금내리

원내(垣內)마을

조선 선조 34년(1601년) 달성인 서원이 임진왜란을 피하여 대구 남산에서 현 용방면에 이주하였다가 금환락지를 찾아 이곳에 정착하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 후 전주 이씨, 장흥 마씨 등이 입촌하여 큰 마을이 되었다. 마을이 커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금동재뜰, 고랑뜸, 건너뜸으로 불렀다고 한다. 지형이 대입(竹葉) 셋이 놓여 있는 형국이라 하여 죽간(竹簡)이라 칭했다는 설과 대나무가 있으므로 섬진강 건너 오봉(五鳳)이 죽실(竹實)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 하여 죽안(竹岸)이라 한 설도 있으며 세월이 흘러 죽안으로 변용하여 칭하였는데 1,800년경 본 군 현감이 지방 순시 때 서씨(徐氏)가 대종을 이루고 있으므로 서 씨는 담 안에서 살아야 번성하니 원내(垣內)로 칭함이 어떠냐하여 이후부터 원내라 칭하였다 한다.

용정(龍井)마을

1926년 남원 이백면 응령에서 최성관(崔成官)이 두 형제와 함께 금환락지의 풍수지리설을 듣고 터를 잡았다고 한다. 마을 회관에 보존되어 있는 용정재기(龍井齋記)의 기록에 의하면 1938년에 마을 회관을 건립, 23 가구가 참여하였는데 최성관(崔成官)의 가문 3호, 보성에서 이주한 김노행(金魯行)의 가문 3호, 광주에서 하병태(河秉台), 최석수(崔錫洙), 고흥에서 김재성(金在成), 강대일(姜大一), 황길수(黃吉守), 순창에서 최성옥(崔成玉), 담양에서 고광담(高光淡), 순천에서 장형석(張亨錫), 유래미상의 이성화(李聖化), 황세영(黃世永) 등과 구례 한동호(韓東浩), 정우천(鄭又千), 최귀림(崔貴林), 정동섭(鄭東俠), 김권수(金權洙), 박종주(朴鍾周), 박경하(朴景夏) 등 23 가구가 마을에 정착하였다고 기록 보존되어 있다. 용정(龍井)이란 이름은 마을 위쪽의 구룡동(九龍洞)과 마을 아래쪽의 삿갓샘 지명을 따서 용정이라 한다.

신기(新基)마을

1920년경 화순군 능주에서 하동 정씨 정종순(鄭宗淳)이 금환락지의 혈지(穴地)라 하여 일가이세(一家二世)대가 입주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흥 등지에서 명지(名地)를 찾아 이주하여 큰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을 개척한 정종순의 고향을 따서 능주촌이라 했는데 1962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새로 생긴 터라 하여 신기(新基)로 불렀다.

안촌(安村)마을

전주 이씨 이금재가 13대손으로서 이곳에서 살고 있는 것과 회관 앞 당산나무가 약 400여 년의 수령인 것으로 보아 마을의 설촌 시기는 약 400여 년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36호로 번창하였으나 2005년 기준 12호가 살고 있다. 섬진강의 광활한 모래벌판이 여울로 어울려져 있는 마을로서 당초에는 양안(陽岸:양지바른 안 동네)이라 불렀다. 그 뒤 섬진강 모래가 아름다워 사탄(沙灘) 또는 모래여울로 부르다가 몇 가구가 살지 않으면서 시끄럽고 화합이 안 되고 모래여울물과 같이 시끄럽다하여 마을 명칭을 개명하여야 한다는 주민들의 뜻에 따라 1982년 안촌(安村)으로 불렀다. 옛날엔 안촌(岸村)으로 쓰기도 하였다.

봉소(鳳巢)마을

1750년경 밀양 박씨와 김해 김씨가 정착하였으며 그 후 진양 강씨, 김해 차씨 등이 마을에 이주해 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 설촌시기는 파도리와 같은 시기에 설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노용준의 집터에 귀틀집이 있었고 박인구의 집이 오래되었으며 1972년에 개축되었다. 처음에는 섬진강변에 마을이 있다하여 진변(津邊)이라고 하였는데 강 건너 오봉산에 살았던 봉황새 5마리가 강을 건너 동서쪽에 집을 짓고 낮에는 오봉산에서 놀다가 밤이면 이곳에 와서 자고 다음날 간다고 하여 봉소라 부르게 되었다. 오평은 지대가 평평한 지대라 하여 오평(梧坪)이라 불렀다.

송정리

송정(松亭)마을

임진왜란 당시 피난을 와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1590년경 금령 김씨(金寧金氏)가 정착하였고 1,800년경 창녕 성씨(昌寧成氏)가 입주하여 큰 마을이 되었다. 안한수내, 한수내(내한, 외한)은 한수천 물이 맑고 차 찬물이 흐른다는 뜻이나 확실히 알 수 없고 신촌은 여수·순천 10·19사건 때 소실되었다가 정착 사업으로 새로 터를 잡아 동네가 되었다. 원송은 소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조정 때 송정리(솔정자나무가 있었다 함)라 했다.

외곡리

기촌(基村)마을

지금부터 약 270년 전 행주 기씨(幸州奇氏)가 터를 잡아 개척했고 기촌 마을에 예속된 하리(머리)는 강씨 추동(楸洞)은 소 씨(蘇氏)가 개척하였으나 불과 몇 호 되지 않아 합해졌다. 행주 기씨가 처음 정착하였다 하여 기씨촌이라 칭하였는데 기 씨는 조동(중기에 속해 있음)으로 이거하고 다른 성씨가 입주하여 기촌(奇村)으로 불렀다. 일명 연곡(鷰谷)-골안 전체를 연곡골이라 불려오고 있는데 마을 앞 송림의 형국이 제비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기(中基)마을

1780년경 연곡사로 수도하러 들어간 중들이 아녀자를 데리고 와 숨긴 곳이 마을이 되었으며 김해 김씨가 절터를 만들고자 했던 곳이라 전하기도 한다. 구한말까지 중이 터를 잡은 마을이라 하여 중터(僧基)라 부르다가 1950년경 이상수가 외곡과 피아골의 중간지점이라 하여 중기(中基)라 개칭하였다.

내서리

신촌(新村)마을

개동터(開洞터-신촌)에 광산 김씨와 경주 이씨가 자리잡고 살아오다가 농토를 따라 새터를 잡아 이사한 곳이 신촌이다. 개동터는 1970년 독가촌 집단화 정책에 의해 현재 신촌 본 마을 앞 새 동네로 고분터(3집)와 함께 집단화되었다. 개동터는 내서리 1구 신촌에 속하며 1975년도 원기, 분동 이전에는 60세대가 넘게 살았으나 2005년 기준 28호가 살고 있다.

원기(院基)마을

고려 중엽 약 600여 년 전에 문주열 23대조가 입촌하고 그 후 200여 년 뒤 파주 임씨 등 타 성씨가 입주하여 한 때 30여 호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1975년 1월 1일 분동되기 전 신촌 마을에 속하였으며 내서리 1구(2구는 남산)라 했다. 원터(院基)는 신라 수노왕의 아들 7형제가 칠불암에서 수도를 하고 있을 때 왕이 아들을 찾아가고 오면서 쉬어가기 위해 큰집을 지었다 하여 원터라는 설과 연곡사를 찾아가던 원님이 이곳을 지나던 중 날이 어두워 문바위 밑에서 하룻밤을 쉬어 갔다 하여 원터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남산(南山)마을

임진왜란 당시 밀양 박씨가 피난하여 터를 잡은 후 전주 이씨 등이 입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 형세가 서울 남산과 비슷하여 남산이라 칭하였다. 마을 뒤 계곡물이 깨끗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붉게 물들어 흐르는 물까지 붉게 보이는 아름다운 곳으로 옛날 선비들이 휴양처로 삼아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겨 홍유동이라 불렀었다.

내동리

평도(平道)마을

신라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가 연곡사를 건립한 후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 중 김해 김씨와 밀양 박씨 2가구가 농경지 이용이 가능함을 알고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피아골이 먼저 생겼고, 지금부터 약 360년 전에 죽몰(竹里)이 생겼다고 한다.

당치(堂峙)마을

고려 초기에 생긴 마을이라고 하나 정확한 설촌년대는 알 수 없다. 농평 앞 큰 당산나무가 있었다. 1989년 104세로 작고한 이영희가 어릴 적에도 당산나무는 큰 나무였으니 300년은 훨씬 넘었을 것이라 했다. 1998년 이 마을에 사는 이경의가 나무를 베어 팔았고 그 후 병이 생겨 죽었다고 한다.원래 문척면에서 엄 씨가 이사와 거주했다는 구전과 현재 농평에 거주하고 있는 이점암의 조부가 5대조 때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에서 이주하였다 하니 200여 년 전에 전주 이씨가 입촌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치에서 동북쪽 약 1.5㎞ 지점에 농평 마을과 독가촌 집단으로 1970년도 폐촌된 높은 터, 연곡사 북쪽 약 500m 지점에 2~3호 있는 물골까지 4개 마을로 형성되었다. 당산나무 집이 큰 재 밑에 있다 하여 ‘당재’라 하고 당재에서 보면 높은 자리에 있다 하여 ‘높은 터’, 노호농 골에 평평한 터라 하여 ‘농평’이라 한다.

직전(稷田)마을
        연곡사에 수백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행하던 시절에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오곡 중 하나인 피(기장)을 많이 심어 피밭골이라 불리던 것이 점차 변화되어 피아골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 마을을 피(직=稷) 밭(전=田)을 써서 직전(稷田)이라 부르고 있다. 연곡사 북쪽 내서천 상류쪽에 피를 많이 재배했다는 피아골(직전)이 펼쳐져 있다. 피아골은 여름철 피서객을 유치하는 숙박시설도 생겨 관광수입도 좋다. 그러나 1998년도 홍수피해로 인명 피해가 발생하여 여름 피서객이 많이 줄어들었다. 

문수리

문수(文殊)마을

임진왜란을 피하여 김해 김씨 김석곤(金石坤)의 14대 조부가 율치(栗峙)에 정착하여 개척하였다는 설에 의하여 약 400여 년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여기며 그 후 밤재, 불당, 중대, 상죽, 신율의 적은 마을이 형성되었다. 구한말에는 상죽이 오미리에 예속되었다가 일제 중엽에 문수리로 통합되었다. 밤재는 학자들이 많았으며 학자들의 피난처로 부르고 있다. 감나무골은 여수·순천 10·19사건 때 소실되었다.

콘텐츠관리

  • 담당부서 토지면
  • 담당자 최봉민
  • 연락처 061-780-8352
  • 최종수정일 202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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