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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의면 위치도

광의면 마을유래

연혁

방광면의 지상, 지하, 천변, 광석, 대촌, 유산, 견곡, 월곡, 수한, 당촌, 훈포, 용전, 용내, 둔전 등 14개 마을과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남원부의 소의면(所義面)의 상촌, 하촌, 연파정, 공북, 온동, 당동, 난동, 구만, 방광 등 9개 마을에 용강면(龍江面)의 사우, 본신 마을의 각 일부를 편입하여 방광면과 소의면의 이름을 결합해서 광의면이라 개칭하고 연파, 지천, 대산, 수월, 방광, 대전, 온당, 구만 등 8개 리를 관장한다. 동쪽으로 마산면, 서쪽으로 용방면, 남쪽으로 마산면과 용방면, 북쪽으로 산동면에 닿았다.

위치

동쪽은 마산면과 서쪽은 용방면과 구례읍과 서시천을 경계로 닿았고 북쪽은 산동면과 접경하고 있다. 천은사 계곡에 흐르는 소아천(小兒川) 유역 지역이다.

광의면 마을

지천리

지하(芝下)마을

조선조 때 함풍(咸豊) 이씨가 현 739-1번지에 떼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 최초이며 그 후 성종조(1470년) 남원 양씨양휸흥이 이주하여 오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마을 이름의 변천과정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에 탱자나무가 많아서 탱자나무 지(枳)자를 써서 지정(枳亭)이라 불리어 오다가 1914년 일제 시대 지초 지(芝)를 써서 현재의 지천리라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상하동으로 구분되어 윗마을을 지상, 아랫말을 본동(本洞)을 지하라 칭하였다.

지상(芝上)마을

약 300년 전인 1700년대 초에 박상이(朴尙履)가 정착한 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설촌 당시는 샛터라 칭하다가 구례현 방광면 지정(枳亭)이라 칭하였다. 1914년 남원부 소의면과 구례현 방광면을 합병하여 지천리라 개칭하고 윗마을이라 하여 지상이라고 칭하였다.

천변(川邊)마을

조선조 초기에 개성 왕씨 왕언기(王彦起)가 서당골을 개척하여 설촌하였으며 그 후 숙족 10년(1684년)에 그 후손 왕지익(王之翼)이 냇가 물에 새터를 잡아 설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설촌 당시 “냇갓몰”이라 불렀고 “천변”이라 기록하였는데 용평(유아머리형)을 지나 마을 앞을 돌아 흐르는 도랑을 계천이라 칭하기 때문에 “천변”이라 칭하였다. 지정이라 부르게 된 것은 길가 방천거리에 큰 탱자나무가 있어 지정이라 칭하였으며 1894년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하고 지천리로 개칭하다가 일제 시대 탱자 지(枳)자를 지초 지(芝)자로 바꾸어 지천리로 정정하였고, 지상, 지하, 천변으로 분리하였다. 또한 서당골은 대대손손들의 학습수련장으로 향유제현을 배출한 곳이라 “서당골”로 불려졌다.

대산리

대촌마을

대촌마을의 형성 시기는 1,600년(선조 33년 경자)경에 문화인 류천재가 곡성 대평리에서 이주하여 개기 설촌하였으며, 그 후 1665년경에 교하인 노현이 입촌하였고, 1669년경에 전주인 최봉학이 입촌하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류천재가 은행나무를 식재한 것이 거목이 됨에 따라 마을 이름을 은행정이라고 불렀다.

유산(乳山)마을

마을 설촌 형성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지금부터 300년 전인 1700년 경 현 사직골(당촌)에서 살고 있다가 마을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전염병을 피하여 현 위치인 유산 마을로 남원 양씨가 처음 정착하였다고 한다. 마을 앞에 위치한 선바위(바위를 쪼아서 만듦)와 마을 앞 돌무덤(1985년 경지정리 때 파묻였음)과 대산리 고인돌 등 광의면 대산리 모랭이 마을(유산마을) 유적지에서 수습된 옹관, 석촉, 석검, 병부편 등이 마을 주변에서 수습되고 산재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마을의 설촌 시기는 이보다 몇 백년은 앞선다고 추정되고 있으며, 조선 후기 기록인 여지도서(與地圖書, 1759)나 호구총수(戶口總數, 1787) 기록에도 방광면에 유산이 속해 있음을 보여줄 때 그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 마을에는 양씨 성은 사망 또는 마을을 떠난 지가 오랜된 실정이다. 마을의 형사이 적먹이 어린이가 어머니 품속에서 젖을 먹은 형상이라 하여 젖 유(乳)자와 모 산(山)자가 합해서 유산으로 부르고 있으며 지금도 젖뫼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산리 속한 것은 주변의 대촌 마을과 젖뫼의 글자 중 대(垈)자와 산(山)자가 합해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산리로 칭하게 되어 지금까지 쓰고 있다.

수월리

월곡(月谷)마을

지금으로부터 133년 전(1870년)에 봉성 장씨, 전주 이씨, 김해 김씨가 마을을 개척하며 마을이 설촌되었다. 그 후 벽진 이씨, 밀양 박씨, 광산 김씨, 진주 하씨 등이 이주하여 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현재 “미영씨 바위”에는 설촌 회갑(1931년) 기념으로 호수 32호, 인구 182명이라 새겨져 있다. 설촌 당시 “월아재”라 했다가 “월암재”라 하였다.(회관 앞 책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 후 다시 “달실”로 개칭되어 불리어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월곡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촌(唐村)마을

1,700년대 전주 이씨 2 가구가 수한 마을에서 이주 개기하였다. 그 후 순조(1800년대 초기)에 인동 장씨가 경상도 산청에서 이주하여 마을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한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에 따른 직조기형(織造機形)의 명칭으로 옥녀봉, 총두재, 개자리, 구리실(꾸리실), 버드실(보디), 잠실, 돋트미(돋트머리) 등 산야곡명(山野谷名)이 산재되어 있어 사직골(沙織洞)이라 칭하다가 구한말(1897~1910) 세제 정립상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당촌으로 명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한(水寒)마을

조선 선조 25년 경 임진왜란을 피해온 경주 김씨 3세대가 개기 하였으며 그 당시 20여 호가 모여들어 비로소 마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물이 차갑다고 하여 “물한이”로 불리어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수한이라고 했다. 수한리, 월곡리, 당촌리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수월리의 “수”자와 월곡리의 “월” 자를 따서 수월리라 하고 수한, 월곡(月谷), 당촌(唐村)으로 부르게 되었다.

방광리

용전(龍田)마을

문헌은 없으나 전해오는 구전에 이하면 1860년경 달성 서씨가 곡성에서 이주하여 개기하고, 그 후 노씨, 정씨, 왕씨가 이주하고 함안 조씨가 하동에서 이주해 오면서 말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설촌 당시 중전리(中田里)로 불리어 오다가 개천에서 용이 승천하였다 하여 용전리로 개칭 되었다. 일서에 의하면 풍수지리설로 볼 때 주형지(舟形地)라 하여 마을 상부에 사공바위가 있고 마을 하부에 조탑(造塔)에 짐대까지 설치하였다. 배는 물을 만나 순행하므로 용(龍)자는 물을 상징하여 용전리로 개칭 되었다고 한다.

방광(放光)마을

문헌이 없어 상세한 고증이 어려우나 원래 방광면은 신라 경덕왕 이후에 새겨진 이름인데 1914년 광의면으로 합병되면서 방광 마을이 되었다. 마을 앞에 “시랑이들”, “객가들”, “옥이들” 등의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치소였음은 분명하다. 임진왜란 때 한(韓)씨가 개기 하였다는 설 뿐이다. 1798년을 기준으로 할 때 둔전리 훈포로 불리어오다 방광으로 개칭되었는데 구전에 의하면 판관이 살았다 하여 판관 마을이라 하였다가 판관이 변형되어 판팽이라 하였던 것이 방광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연파리

연파(煙波)마을

백제 때 구차례현에 속하고 신라 경덕왕이 구례현으로 개칭 곡성군과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는 남원부 소의방에 속하였다. 1414년 조선조 제 7대 세조 때에 순천진에 속하였는데 1592년 선조 25년에는 남원진에 속하였다가 1708년 숙종 34년에 운봉진에 속하였다가 1895년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다시 남원부에 속했다가 일제하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례현 방광방과 남원의 소의방을 합병하여 광의면으로 칭하고 본 마을은 그 면소재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앞 서시천이 해(亥)방에서 입수하여 금색유수(金色流水)하여 미(未)방으로 관류하고 물흐름의 파도가 연기처럼 일러서 파토반용(波土盤龍)의 파(波)자를 부터 연파리(煙波里)라 하였고 또는 마을이 금수대(錦繡帶)와 같고 연화도수(蓮花倒水)와도 같은 서시천이 흘러 그 첫 자인 연(蓮)자와 파토반용의 파(波)자를 따서 연파정(蓮波亭)으로 칭하였으나 연(蓮)자가 연(煙)자로 변경되어 현재 쓰고 있다는 설이 있다.

공북(拱北)마을

설촌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순조 7년(1807년) 공북촌으로 개칭되기 전에 “신대(新大)라 호칭한 것으로 보아 설촌 시기는 1700년대가 아닌가 추정된다. 마을에 전해내려 오는 구전에 의하며 조씨와 청주 한씨가 남원에서 이주하여 개기하였다고 한다. 설촌 당시”신대“라 칭하다가 조선 순조 7년에 공북으로 개칭하여 부르고 있다. 마을의 지형이 마치 팔꿈치처럼 생겼다고 하여 ”팔꿈치 고(拱)“자와 마을이 북을 향하고 있다하여 ”북(北)“자를 써서 공북이라 한다.

대전리

하대(下大)마을

조선 중종 13년(1482) 김해 김씨, 청주 한씨, 삭녕 최씨 등이 입촌하여 농겨지가 크다하여 ‘한밭’으로 부르다가 1592년(선조 25)에 남원진에 속하였다가 1708년(숙종 34)에 운봉진에 속한 후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다시 남원부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례현 방광방과 남원의 소의방이 합병 되면서 마을 이픔이 한밭에서 대전리로 법정리가 되고 대전리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하대’라고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상대(上大)마을

설촌 연대는 세종 초엽(1460년경)에 경주 정씨와 김해 김씨의 입촌으로 여겨진다. 그 동안 주민의 셰계(世系)는 경주 정씨 13호, 김해 김씨 9호, 밀양 박씨 5호, 진주 강씨 4호, 전주 이씨 7호 등이 주류로 류(柳), 장(張), 임(林)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1460년경 설촌 당시는 구석물(각우촌, 角隅村)이라고 하다가 남원부에 환속되던 연산군 5년(1499)에는 남원부 소의면 상촌(上村)이라 하였다. 그 후 일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전리의 위뜸이라고 하여 상대로 개칭하게 되었다.

온당리

당동(堂洞)마을

설촌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 중기부터 김해 김씨가 들어와 설촌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당시 근처에 미륵탑(彌勒塔)이 있어서 탑동(塔洞)이라 하였고 조선 시대 초에는 100여 호에 이르는 대촌이었다고 하며 조선조에 국태민안을 위한 지리산 남악사를 본 마을 북편에 건립(연대미상) 춘추(春秋)로 제사를 모시며 남원부사를 위시한 근읍(近邑) 수령(首領)의 왕래가 빈번하여 마을 주민들의 번거로움과 피해가 많아 타처로 이주를 많이 해버렸다. 1499년에는 남원부 소의방 탑동이라 하였고 그 후 1908년 일제의 탄압으로 결국 남악사가 폐사되어 당(堂)이 없어졌다하여 당몰이라 칭하다가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법정리로 온당리 당동으로 칭하였다.

난동(蘭洞)마을

마을 뒤 동편에 있는 난야사(蘭若寺-현 건물은 근년에 지음)는 고려 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근래(1915년경) 거란(契丹) 연호(年號)가 새겨진 종(種)이 발굴되었으나 일본인들이 가져가 버렸다고 한다. 또한 난야사(蘭若寺)가 고찰(古刹)이지만 이와 함께 설촌 되었다고 단정 할 수는 없으나 사찰이 있었으니 본 마을의 설촌 시기도 고려말이나 조선 초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마을 근처에 난초가 많이 있다하여 난곡(蘭谷)이라고 마을명이 붙혀져 있고 그래서 “난초골”이 “난죽골”로 변해 불려졌다. 근세에 와서 남원부 소의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남원부 소의방과 구례현 방광방 이 합하여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 난동 마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온동(溫洞)마을

1500년경 전주이씨가 설촌 하였고 1600년경에 김해김씨 「윤구(允九)」가 입촌하였으며 1700년경에 전주최씨 문성공(文成公) 하(河)의 후예「명원(鳴元)」이 입촌 정착 한 후 그 손들이 번성하여 세 성씨 중 전주 최씨가 가장 많으며 1950년대에는 약 100여 호의 대촌으로 되었다가 여순사건과 6.25난을 겪으며 산간마을로써 피해가 심하자 각지로 이사를 많이 해 버렸다. 1592년(선조 25)에는 남원부에 속하였다가 1708년(숙종 34)에 운봉진에 속하였으며 1895년(고종 32)에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다시 남원부에 속한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광의면 온당리 온동으로 칭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이름은 이 마을에 옛날부터 온수(溫水)가 난다고 하여 “온수골”이라 부르다가 온동 이라고 하였다.

구만리

구만(九灣)마을

1580년대 조선 선조(宣祖)시에 삭녕최씨(朔寧崔氏) 상중(尙重)이 지금은 구만제로 편입해 버렸으나 성원촌(星院村, 속칭 별원촌)을 설촌하고 번성하여 5대에 걸천 5현(五賢)을 배출하여 영화를 누렸으나 설(說)에 의하면 맛보는 산 까치절의 도승의 저주를 받아 세를 부리던 최씨 집안이 패망하고 그 손들이 성원촌(별원)에서 서편으로 흐르는 내(川) 위에 높은 곳인 구만리로 된 곳에 정착하여 제성씨(諸姓氏)들이 입촌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고 1592년 남원부에 속하였다가 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남원부에 속한 후 왜 정칭하가 되면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남원부 소의방(所義坊)에서 구례현 방광방(放光坊)과 합하여 광의면이라 하면서 본 마을도 광의면 구만리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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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광의면
  • 담당자 조영혁
  • 연락처 061-780-8453
  • 최종수정일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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